영화를 보지 않았거나 미성년자들은 이 글을 멀리해라. 부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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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띨리아, 나는 당신같은 여자를 사랑한단다!
낙태는 인류가 누리를 수 있는 가장 큰
의료혁신이다.
나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내가 속한 종교에서는 적극적으로 그것을
반대하고
있지만, 그것은 그저 원리원칙일 뿐이다. 어두운 시대에 그들이 인류를 유린한
역사를
근거해볼 때 원칙주의자들의 주장은 설득력을 상실한다. 낙태의 주체는 나라나 종교
따위의
단체가 아니다. 아이를 잉태한 인간만이 모든 권리를 갖는다. 그러나 이
세상은
어떠한가. 노동자를 끊임없이 생산하는 여왕벌처럼 임신한 여성들에게 낙태가 죄악임을 끊임없이
주입시킨다.
주체로서 자신을 추스릴 수 없는 소녀들은 임신의 불안함속에 늘 내동댕이처저
생활하는
셈이다.
요컨대, 낙태가 법으로 금지받아 마땅한 죄악이라면 숫컷들이 함부로
자지를
놀리게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타당한 법이다. 낙태를 법으로 금지하는
집단과
임신을 촉발시키는 집단이 같다는 것에서 여자들은 절망한다. 세상은 그런 법이다.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 법을 어기는 단초를 제공하는 것이다. 아무때나 시도때도 없이
바지를
벗고 자지를 흔들어 대는 집단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집단도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간단하다. 정자를 흩뿌리지만 않는다면 성모님이 아닌다음에야 다음
세대를
잉태할 수 없는 노릇아닌가. 법적 근거를 내 세워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임신과 육아의 주체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자지를
가진
족속들은 볼일이 끝나면 상대가 자신에게 찐따를 붙기전에 황급히 바지를 추켜입고
그
자리를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극중 싸구려 낙태업자 베베만 봐도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쉽게 입증된다.)
아아아. 오띨리아.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멍청한
룸메이트를 위해 낯선 남자에게 다리를 벌리다니. 맙소사. 믿을 수 있겠는가,
당신은?
이것이 우정이라면 그 우정은 숭고하다 못해 거룩하기까지 하다. 맙소사! 그
띨띨한
룸메이트 덕에 그녀는 하루동안 이른 바 조뺑이를 친다. 조뺑이 바로
그거다.
몸 바쳐 낙태를 무사히 마치게 한 크나 큰 호의 뿐만
아니라.
그녀는 사산된 아이의 시체까지 운반해 처리하는 무모함을 완벽하게 소화해 낸다.
띨띨한
루미 Roomy 년이 다시 태어나도 오띨리아가 자신에게 해 준 모든
것을
잊으면 안될 지경이다. 맙소사!
이 영화가 루마니아의 혁명 2년전에 초점을 맞추든 그렇지 않든, 그리고 지금껏 낙태가 정자를 함부로 뿌려 자궁에 처 넣은 집단의 반성이나 사과가 없는 한 여성 자신들이
고뇌했던 수세기의 업보는 쉬이 가시지 않을 것이다. 양측의 쾌락을 위한 섹스가 고통분담없는 임신녀 혼자만의 자괴감으로 마감지어지는 역사가 혁명이 휩쓸고 지나간 부쿠레시티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았을 터. 작금의 서울도 마찬가지다. 얼마나 많은 사산된 아기들이 시궁창에 처박히고 있을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불법 낙태 시술로 돈을
벌며
힘 없는 여학생들을 협박해 자신의 욕정을 풀어버린 베베를 보면서 분노하지
않는
다면 당신은 사람도 아니다. 허나 그 분노가 베베라는 인간백정에게로만 향해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더러운 역사의 반복일 뿐이다. 역사가 돌고 돌아 결국 제자리에
정착하게되면
여성들이 느꼈던 불행은 끝없이 이어질 수 밖에 없다. 혁명이 지나간
거리에
낙태가 합법이 되었다 한들, 정신적이나 육체적으로 학대받는 혼전임신녀들의 삶이 결코
상전벽해
되지 않을 (여전히 빌어먹어 빠진) 세상 아니던가.
피 끓는
청춘들에게
의무적으로 콘돔을 나눠주는 켐페인 하나만 정착해도 수 많은 임신녀들의 고통이
줄어들
것이다. 오띨리아의 부모가 대학을 나오지 않은 것을 비난할 줄 만
아는
지식인 기성세대의 획기적인 자각이 있어야만 오늘 날 원치 않는 임신으로
고통받는
수 많은 청춘들의 삶이 시작조차 하기 전에 낙오되는 불행에서 해방될
것이다.
오띨리아의 고군분투에 적어도 약 10분간의 열광적인 기립박수를 보낸다. 띨띨한
룸메이트의
주접스런 거짓말에 분노하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그나마 믿을 사람들은 같은
종족인
여성자신이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 그녀가 자신의 남자친구에게 한 없는
슬픔을
느꼈겠지만 말이다.
작년 깐느의 선택은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