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살았던 거리에서

일쌍 2008/03/17 12:32 Posted by 버트

- 뭐하고 지내냐?
- 뭐든 하고 지냅니다. 하하하.


싱겁지만 이게 나다. 뭐하고 지내든 암튼지간에 뭐든 하고 있는 삶이다. 나로서도.

- 요즘 무슨 일 하는데.
- 무슨 일이든 하죠. 하하하.


보통 확실한 스페셜티로 밥을 먹고 사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묻지 않을 테지.

- 여전한 것 같구나.
- 여전합니다. 형도 여전하세요?
- 응. 나야 뭐 늘.
- 공항이시죠?
- 응.
- 어때요? 영종도서 살면. 심심하지 않아요?
- 너는 어때? 서울 살면 심심하지 않니?
- 아뇨. 심심하죠. 늘.
- 다 똑 같은게지. 사는 게 다.


비어 있던 극장 로비가 갑자기 소란 스러워진다. 한무리의 아이들이 몰려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휴대폰을 좀 더 귀에 밀착 시켰다.

- 요즘도 영화 많이 보냐.
- 네.
- 여전 하군.
- 여전하다니까요. 하하.
- 뜬금없이 메시지를 보내 사랑한다고 하는 것도 여전 해. 너다워.
- 하하.
- 유감이지만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 유감이네요.
- 그런 단어는 듣기만해도 두드러기가 나. 더구나 남자에게서라니.
- 사랑은 원래 그렇대요.
- 원래?
- 원래 사랑은 두드러기라네요.
- 누가 그래?
- 프랑스의 유명한 누군가가요.
- 너 그거 지어낸거지?
- 네.
- 미친, 여전하네.


전화를 하면 상대가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금방 알아채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전화가 좋다. 감정을 들킬 필요가 없다. 서로에게.

- 사실 별일 없진 않아요. 이사갑니다.
- 이사? 너 어디 사는데 지금.
- 형 일하는데서 택시 7만원쯤 나오는 동네 살아요.
- 머네. 그런데 어디로?
- 좀 시내쪽이요.
- 시내라. 좋지. 지금은 외곽인가보구나.
- 외곽이죠. 경기도와 겨우 담하나 사이에요.
- 나도 인천이잖냐. 바다와 배 한 척 사이지만.
- 하하하.


요즘 봄이라 베토벤을 자주 듣는다. 이무지치가 방한한 것 보니 봄이다 싶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봄엔 베토벤이 좋다. 특히 9번. 새싹이 꿈틀거니는 소리에 딱 이다 싶을정도로 어울린다.

- 근데?
- 네?
- 이사가는데, 왜 뜬금없이 메시지질이야. 평소엔 존나 생까는 게 취미인 새끼가.
- 그러게요. 왜 그랬을까.
- 지랄.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새끼들, 아주 짜증나.
- 하하. 여전하네요.
- 너만 할까.


쓸쓸한걸까. 그래서 메시지를 보낸 걸까. 너만 할까. 란 문장은 그녀를 떠 올리게 한다. 그녀는 내가 뭐라 나무라면 늘 그렇게 되받아치곤하기에.

- 이사갑니다.
- 들었어.
- 네. 이사를 가요.
- 사귀는 사람과는?
- 이상해요.
- 뭐가.
- 멀어져요. 거리상으론 그런데 말이죠. 그게 거리상은 멀어지는데 친밀함은 오히려 늘어나는 것 같아요.
- 왜?
- 설명하기 힘들어요. 같이 살지 않기에 거리가 중요하지는 않지만 뭐랄까, 이상한 기분이 들어요. 흠. 사실 아까 내가 이사갈 집을 다녀왔어요. 그곳은 내가 사귀는 사람이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동네에요. 오래된 동네죠. 아파트보다 오래된 주택이 많아요. 내가 예전에 살던 그런 동네랑 몹시 닮았어요. 이곳에 소녀였던 내 여자친구가 살았던 거에요. 생각해 보세요. 나는 그가 어렸을 때를 알지 못해요. 그를 만난 것은 우리들의 나이가 어느새 30대중후반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을 때였으니까요. 내가 그녀의 어린 시절을 알지 못해 섭섭하지만 어떤면에선 우린 비긴셈이죠. 그녀 역시 내 어린 시절을 본 적이 없으니까요. 공평해요. 어느면에선. 그녀의 삶에서 우리의 연애기간을 빼면 정말 보잘 것 없는 시간이지요. 나는 그것이 그녀가 살아온 긴 세월보다 훨씬 수준 높은 시기이길 바랍니다. 그래서 그녀의 어린시절이 녹아있는 동네로 이사를 가는 것이 특별하다고 생각했어요.


목이 말랐다. 하지만 매점은 너무 멀고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 그녀가 자신의 추억이 고스란히 베어있는 동네를 낯선 이에게 설명해주었어요. 여기 시장이있다. 가까우니 장보기 좋을 것이다. 여기가 성당이다. 가깝지? 좋지? 저기가 주민센터야 조금 먼 듯하지만 그래도 뭐. 아 참 요 로터리에서 명동가는 버스도 있어. 여차하면 여기서 버스타는거야. 당신 좋아하는 극장들이 십여분 거리안에 존재해. 이제부터는. 그녀는 쉴새없이 지껄였지요. 적어도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이 동네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정도로 오래동안 지껄일 수 있다는 듯이 말이죠. 나는 골목골목에 그가 뿌려놓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더듬어 봅니다. 앞으로 무수하게 지나칠 그녀의 지난 날이 거기 있어요. 바로 그곳에요. 나는 분명 그녀가 지금 살아가는 동네와는 멀어지지만 사실은 더욱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어요. 그곳은 그녀가 자란 곳이고 이제 내가 살아갈 곳이거든요.


전화는 오래지 않아 끊겼다. 선배가 내 뜻모를 수다를 끝까지 들어주기엔 남은 일요일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해한다.

나는 지금 그녀가 살았던 거리를 밟고 살아갈 것이다. 그것은 내게 의미다. 미닝 오브 라이프는 제각각이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영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내가 무언가 가치 있는 글들을 쓸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내 곁에 그가 존재하기 때문일거라 나는 믿는다.

거리가 멀어지지만 더욱 친밀해지고 싶다. 그 친밀감이 더욱 농밀해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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